BIBLIOGRAPHY

류영모. 2025. 다석일지. Translated by 정양모. https://m.yes24.com/goods/detail/143642860.

정양모. 2010.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4372530.

History

다석일지

(류영모 2025)

  • 류영모 {정양모} 2025

류영모의 유일한 저서, 암호문 같은 일기를 20년 동안 주해하다다석(多夕) 류영모(柳 永模, 1890-1981)는 동서고금에 능통했던 석학이자 평생 진리를 좇은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로 우리말로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1940년대 정인보, 이광…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정양모 2010)

  • 정양모
  • 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다석 류영모

[2025-02-12 Wed 21:51]

출생 : 1890년 03월 30일 사망 : 1981년 02월 03일

  • 1907년 서울 경신학교 입학
  • 1910년 오산학교 교사
  • 1921년 오산학교 교장

다석 류영모

다석 류영모는 온 생애에 걸쳐 진리를 추구하여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이다. 젊어서 기독교에 입신(入信했) 던 다석은 불교와 노장老( 莊,) 그리고 공맹孔( 孟사) 상등 동서고금의 종교.철학 사상을 두루 탐구하여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진리를 깨달아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적인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다석은 우리나라 3천재,5천재의 하나라는 말을 들었고,평생을 오로지 수도와 교육에 헌신하면서 일생동안‘ 참’을 찾고‘ 참’을 잡고 ‘참’을 드러내고 ‘참’에 들어간 ‘성인’이다. 이승훈,정인보,최남선,이광수,문일평 등과 교유했고, 김교신,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같은 이들이 다석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다.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2008년)에서 제자인 함석헌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소개될 만큼 다석의 사상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2025-02-12 W06

@user 다석 류영모 선생에 대해서 알려줘

@assistant 다석 류영모 선생은 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나 1981년 2월 3일 세상을 떠난 한국의 개신교 사상가, 교육자, 철학자입니다. 그의 호는 다석(多夕)이며, 조만식, 김교신 등과 같은 세대에 속합니다. 그는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이현필 등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석은 16세에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32세에 평양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습니다. 이후 YMCA에서 30년 이상 연경반 강의를 통해 성경과 동서양 경전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와 서양의 기독교 사상을 조화시키려 했으며, “얼나” 사상으로 알려진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다석은 하루 한 끼만 먹고,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며, 심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사상은 인류의 문제를 식과 색에서 찾으며,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자는 철학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강의록과 일기들은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은 한국의 정신적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1][2][3][5].

Citations: [1]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8559 [2] https://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881 [3] https://ko.wikipedia.org/wiki/%EB%A5%98%EC%98%81%EB%AA%A8 [4] https://www.youtube.com/watch?v=q3yftS45dzQ [5]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aiculture&logNo=221486149274

@user 함석헌과의 관계

@assistant 다석 류영모와 함석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로서 시작되었습니다. 함석헌은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류영모는 함석헌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1][2]. 그러나 함석헌의 개인적 삶의 선택에 대해 류영모는 실망을 느꼈고, 이는 결국 함석헌을 파문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1]. 함석헌은 스승에 대한 죄책감과 회한을 느끼며, 류영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의 기일마다 찾아와 사죄와 후회를 표했습니다[1].

함석헌은 류영모의 금욕적이고 단순한 삶을 따라하려고 했으나, 결국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는 류영모가 추구한 신앙의 본령과는 다르게, 함석헌이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결과였습니다[1].

Citations: [1] https://www.ajunews.com/view/20201104085918991 [2] https://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881 [3] https://www.ajunews.com/view/20200810105003832 [4] https://blog.naver.com/isomis/222309878295?viewType=pc [5]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612

@u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