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 점점 한병철 아재의 책들이 스며든다. 강하다.
- 담음
관련메타
BIBLIOGRAPHY
한병철. 2010. 피로사회 : 페러다임 전환. Translated by 김태환. 문학과지성사. https://m.yes24.com/Goods/Detail/6425989.
———. 2021. 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Translated by 전대호. 김영사.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597548.
———. 2023a. 서사의 위기 : 스토리 중독 사회. Translated by 최지수. 다산초당. https://m.yes24.com/Goods/Detail/122477521.
———. 2023b. 정보의 지배 :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Translated by 전대호. 김영사.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17710125.
———. 2024a. 관조하는 삶 : 무위에 대하여. Translated by 전대호.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5962273.
———. 2024b. 불안사회 - 왜 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잃어버렸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9777089.
———, ed. 2023c. 정보란 무엇인가 : 정보의 지배. Directed by 한병철. https://www.youtube.com/watch?v=9sKqRttEmJY.
불안사회 - 왜 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잃어버렸나?
(한병철 2024b)
- 한병철
책소개
피로사회에서 불안사회로… 시대적 상처를 진단하는 철학자 한병철, 불안의 시대에 공감과 연대의 힘을 역설하다! “왜 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잃어버렸나?”
10년 전 『피로사회』로 한국에서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던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철학자 한병철의 또 하나의 논쟁적 저작.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라고 말하는 그는 최신작 『불안사회』에서 이 시대의 질병을 ‘불안’이라 진단하며 불안이 잠식한 사회에서 끊어져 버린 연대와 만연한 혐오에 경종을 울린다. 불안을 체제적으로 사용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이 책은 짙은 불확실성과 깊은 무기력에 빠진 현대인의 삶에 필요한 것은 ‘희망’임을 강조한다. 불안에 잠식되어 미래를 그리지 못하고 과거의 트라우마에 빠져 허우적대는 삶은 그야말로 ‘생존의 삶’ 그뿐이다. 실패에 대한 불안, 소외에 대한 불안, 도태에 대한 불안.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저 살아남기 위해 달려간다. 문제는 질병처럼 창궐하는 불안이다. 엄습하는 정체 모를 위협감에 대화와 경청, 공감과 화해가 붕괴된 사회는 감옥과 다름없다.
From Fatigue Society to Anxiety Society… Philosopher Han diagnoses the wounds of the times, emphasizing the power of empathy and solidarity in an age of anxiety!
“Every era has its own major disease,” says the world’s best-selling author and philosopher, who made waves in Korea a decade ago with The Fatigue Society. In his latest book, The Anxiety Society, he diagnoses the disease of our time as anxiety, sounding the alarm over the broken solidarity and pervasive hatred in an anxiety-ridden society. The problem is that we have lost the ability to hope in a modern world that systematically uses anxiety. This book emphasizes that hope is what we need in a world of deep uncertainty and profound lethargy. A life consumed by anxiety, unable to envision the future and mired in the traumas of the past, is a life of survival. Anxiety of failure, anxiety of alienation, anxiety of abandonment. We constantly beat ourselves up, trying to survive.
0. 들어가며
1. 희망과 행위
2. 희망과 인식
3. 삶의 형태로서의 희망
책 속으로
우리는 살면서 절망의 바닥에 도달할 때가 종종 있다. 다시 올라올 힘이 없을 때, ‘희망의 정신’이 있어야 비로소 그 절망의 바닥에서 두 눈을 뜨고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의 수고로움이 모두 흩어져 사라지고 고요해진 밑바닥에서 손으로 다시 흙을 쥐는 순간, 아무도 정복할 수 없는 나만의 ‘바닷가의 보헤미아’가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벨과 첼란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 존재를 가능케 하는 탄생성을 지닌 희망이 우리 시대가 추구해야 할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 「역자 서문」 중에서
불안은 훌륭한 지배 도구다. 대중을 순종하게 하고, 공갈에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불안한 분위기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없다. 이는 억압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불안을 공공연히 부추기는 혐오 발언이나 이른바 쉿 스톰은 자유로운 의견 표출을 가로막는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사유에 대한 불안마저 가지고 있다. 사유할 용기가 사라져 가는 듯하다. 사유는 ‘완전히 다른 것’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불안의 분위기 속에서는 같은 것들끼리 순환한다. 대세 순응주의가 만연해진다. 불안은 ‘다른 것’으로의 접근을 차단한다. 다른 것은 ‘동일한 것’의 논리에 해당하는 효율성과 생산성의 논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적 사유는 낙관적 사유와 다르다. 희망과 달리, 낙관주의에는 부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낙관적 사유에는 의구심도, 절망도 없다. 완전한 긍정이 낙관주의의 본질이다. 낙관주의는 어떠한 것이 좋은 쪽으로 흘러갈 거라고 굳게 확신하는 사유 방식이다. 따라서 낙관주의자에게 시간은 닫혀 있다. 낙관주의자는 닫혀 있지 않은 미래, 가능성의 여지로서의 미래를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낙관주의자에게는 새로이 발생하는 것이 없다. 낙관주의자에게 놀라움을 안겨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미래란 ‘처리 가능한 대상’이다. 그러나 실제 미래라는 시간은 ‘처리 불가능성’ 안에 존재한다. 낙관주의자는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곳에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 이들은 기대하지 않은 것 또는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만연한 불안은 실제로는 영구적인 재앙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조적인 이유와 연관된, 그래서 구체적인 사건에서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넓게 퍼진 불안에 괴로워한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불안의 체제다.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떼어 내, 각자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도록 했다. 총체적 경쟁과 늘어 가는 성과 강박은 공동체를 침식시킨다. 자기애적 고립은 외로움과 불안을 낳는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점점 불안으로 채워진다. 실패에 대한 불안,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충족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 뒤따르지 못하거나 도태될 거라는 불안. 그러나 고루 퍼진 이러한 불안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생산성을 높여 준다. --- 「들어가며」 중에서
동물에게 언어적 능력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물이 쓰는 언어는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시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들에게는 공감적 미래의 개념이 없다. 그러나 희망은 미래 안에 존재한다. 동물은 의미를 지닌 신호를 보내는 방식으로 의사소통한다. 그러나 동물이 약속하는 말을 할 수는 없다. 또한 동물의 언어는 서사적이지 않다. 그래서 동물들은 서사가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동물도 ‘원하는 것’은 충분히 표현할 수 있지만, 희망은 서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므로 동물이 표현할 수 없다. 서사적 이야기는 시간에 대한 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동물은 내일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킬 능력이 없다. 내일이라는 개념은 서사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은 이러한 서사적 미래에 접근할 수 없다.
밤의 꿈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과 달리, 낮의 꿈은 유토피아적 잠재력과 정치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낮의 꿈에서만 아름다움, 숭고함, 변용이 나타날 수 있다. 밤의 꿈에는 유토피아적 시 야, 유토피아적 움직임이 없다. 밤의 꿈은 행위하는 것을 싫어한다. 혁명가들은 낮의 꿈을 꾼다. 혁명가들은 앞을 향한 꿈을, 그것도 함께 꾼다. 세상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꿈은 강렬한 희망에서 유발된 낮의 꿈이다. 밤의 꿈에 희망의 자리는 없다. 밤의 꿈은 대부분 소원과 불안의 꿈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밤의 꿈의 기능은 과거에 겪은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처리하는 것이다. 밤의 꿈에는 미래의 차원이 없다. --- 「희망과 행위」 중에서
에로스 없이는 동일함의 지옥에 갇히게 된다. 들뢰즈는 심오한 질문을 던졌다. “‘친구’가 사유하기 위 한 조건이 (…) 된다면 ‘친구’의 의미는 무엇일까? 연인, 오히려 연인이 맞지 않는가? 그 친구가 순수 사유에서는 배제되었다고 여겼던 타자와의 생생한 관계를 다시금 사유 속으로 포함하지 않는가?” 인공지능은 친구도, 연인도 없으므로 사유할 수 없다. 인공지능에게 에로스는 없다. 인공지능에게는 타자를 향한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 「희망과 인식」 중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는 ‘일상성’에 빠지거나 ‘존재할 수 있음에 대해 불안해’한다. 고양된 기분이나 고조된 기분은 현존재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지닌 부담스러움의 특성을 계속해서 주장한다. 그는 희망마저도 부담스러움의 특성으로 귀속시킨다. 그러나 희망은 고양된 기분이 되어 우리에게서 실존의 부담을 덜어 내 준다. 희망은 현존재의 부담을 덜어 주거나 가볍게 해 준다. 그러한 희망에서 우리가 ‘내던져짐’과 ‘죄책’을 초월할 수 있게 해 주는 움직임과 약동이 나온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는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그런 현존재에게 은혜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희망은 은혜를 받을 줄 안다. 또한 하이데거는 희망의 시간성을 ‘이미 존재함의 양태’라고 잘못 해석한다. 희망은 ‘아직 아닌 존재의 양태’로 특징지어진다. 하이데거는 ‘Avenir’로서의 미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 「삶의 형태로서의 희망」 중에서
출판사 리뷰
미래도 없고, 연대도 사라지고 깊은 무기력에 빠진 현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 『불안사회』 출간! “왜 우리는 희망하는 법을 잃어버렸나?”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가 불러일으키는 거시적 불안부터 취업난, 노후빈곤, 물가상승이 불러일으키는 일상적 불안까지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다중 위기 속에 놓여있다. 하나의 재앙에서 다음 재앙으로 마치 줄타기하듯 이어지는 삶에서는 불확실성의 공포와 짙은 무기력이 동시에 느껴진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철학자인 한병철은 신작 『불안사회』에서 이 시대의 질병을 ‘불안’이라 진단하며, 난무하는 불안에 미래와 자아를 빼앗긴 현대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물론 미래에 닥칠 위험을 감지하고 우려하는 것은 정당한 불안이다. 문제는 질병처럼 ‘창궐’하는 불안이다. 불안을 자극하기 위한 모든 행위는 결코 미래지향적이라고 볼 수 없다. 엄습하는 정체 모를 위협감에 대화와 경청, 공감과 화해가 붕괴된 사회는 감옥과 다름없다. 불안만으로는 미래에 닥칠 그 어떤 문제와 위험에도 적절히 대비할 수 없다.
이 책을 먼저 접한 해외의 독자들은 “한마디로 최고다”, “그는 언제나 우리 사회와 정신에 대해 아주 훌륭한 성찰을 내놓는다”, “독자들을 철학과 문학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지평선 너머로 데려가는 책”이라며 그의 메시지에 열광했다. 실패에 대한 불안, 소외에 대한 불안, 도태에 대한 불안…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계속 불안하게 하는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생존사회에서 우리를 병자로 만드는 ‘불안’에 대한 고찰
우리를 집어삼킨 불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안정적인 미래를 그릴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사람들은 쫓기듯 주식 투자를 하고, 이른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로 집을 산다. 직장에서는 더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체력과 정신을 갈아 넣고,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진심 없는 인간관계에 매달리기도 한다. 전에 없던 펜데믹을 겪은 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전쟁, 기후위기와 같은 재난 상황에서 국가나 체제가 우리를 도울 수 없다는 불신은 우리 사회를 더욱 개인주의적으로 만들고 있다. 안개 속에 갇힌 미래를 위한 끊임없는 희생과 막연한 비상체제에 사람들은 지쳐가고, 그 와중에도 늘어만 가는 경쟁과 성과 강박 속에서 연대와 공감은 힘없이 붕괴된다. 실패에 대한 불안, 뒤따르지 못하거나 도태될 거라는 불안이 우리의 자아를 빼앗는다.
이에 한병철은 『불안사회』에서 무엇이 우리를 계속 불안하게 만드는지, 불안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면밀하게 고찰한다. 오늘날의 불안은 사실 영구적인 재앙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불안의 체제로 인한 것이다. 이 체제는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떼어 내 개인으로 존재하도록 만든다. 끊임없는 경쟁과 성과에 대한 강박은 연대를 끊고 개인을 고립시킨다. 불안이 지배한 곳에 자유란 없다. 불안과 자유는 상호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불안은 사회 전체를 감옥, 수용소로 만들어 버린다. 불안은 이정표는 세우지 않으면서, 오로지 경고 표지판만을 세울 뿐이다. 그렇기에 불안사회에서 사람들은 늘 불안에 찬 눈으로 삭막한 미래를 곁눈질할 뿐이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하나의 위기에서 다음 위기로, 하나의 재앙에서 다음 재앙으로, 하나의 문제에서 다음 문제로 줄타기를 하며 살아간다.
우울하고 탈진한 미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은 강렬해진다, 그것이 희망의 변증법이다”
불안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저자는 ‘희망’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희망은 낙관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다. 절망 속에서도 나아가려 애쓰는 마음인 희망과 달리 낙관주의에는 부정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은 ‘전진’이다. 미래도 없고, 연대도 사라지고 깊은 무기력에 빠진 현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희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인에게 ‘희망’에 관한 긍정적인 기억 따위는 없다. 예전부터 희망은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의미 없는 환상을 만들어내며, 실제 삶으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한다고 여겨졌다. 심지어 희망한다는 것은 도피하는 것, 발 디디고 살아야 하는 현재의 삶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병철은 이 책에서 희망에 관한 기존의 생각들에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이 소위 ‘회피’하는, 심지어는 ‘배신’한다고들 말하는 ‘삶 자체’ 또는 ‘그 자체로 서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저 영양분을 섭취하면 되는, 생존에 필요한 영양만 있으면 되는 삶인가? ‘관념’도 없이, ‘의미’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지는 ‘그 자체로서의 삶’은 과연 생각할 수 있는, 갈망할 가치가 있는 삶인가?”
- 『불안사회』 45쪽
『불안사회』에서는 철학자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 에리히 프롬, 하이데거를 비롯해 작가 잉게보르크 바흐만, 바츨라프 하벨, 아힘 폰 아르님까지 다채로운 인용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비판적으로 인식되었던 희망을 샅샅이 해부해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희망에 관해 제대로 아는 것에서부터 사회적ㆍ개인적 불안이 치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의 시대에서 연대와 공감, 희망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결코 위기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불안의 공포 대신 희망의 정신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이유다.
관조하는 삶 : 무위에 대하여
(한병철 2024a)
- 한병철 전대호
- Vita Contemplativa: In Praise of Inactivity
- 올리버 버크먼 #영국 #저널리스트 #시간관리 #마인드셋 #불완전주의자 여기서 나온 책
- 도파민 홍수 시대 우리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삶의 형태는 ‘무위’다!
들어가며
무위의 풍경들
장자에게 붙이는 사족
행위에서 존재로
절대적인 존재 결핍
행위하기의 열정
도래하는 사회
책 속으로
침묵은 말을 심화한다. 고요가 없으면 음악은 없고 단지 소음과 잡음만 있다. 놀이는 아름다움의 정수다. 자극과 반응의 패턴, 욕구와 충족의 패턴, 문제와 해답의 패턴, 목표와 행위의 패턴만이 지배할 경우, 삶은 생존으로, 발가벗은 동물적 삶으로 쪼그라든다. --- p.13
모든 것이 단기적이고, 호흡이 짧고, 근시안적으로 되어버린 이 서두름의 시대에 무위는 희귀하다. 오늘날 모든 곳에서 관철되는 것은 소비주의적 삶꼴이다. 그 삶꼴 안에서 우리는 모든 욕구를 즉각 충족시킨다. 우리는 기다릴 끈기가 없다. 그 끈기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익어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 p.24
무위의 변증법은 무위를 문턱으로, 불확정성 구역으로 변신시킨다. 그 구역 덕분에 우리는 이제껏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 문턱이 없으면, 같음이 반복된다. --- p.33
생산 강제가 언어를 장악하면, 언어는 노동 모드로 전환된다. 그러면 언어는 정보 운반자로 쪼그라든다. 즉, 한낱 소통 수단이 된다. 정보는 언어의 행위 형태다. --- p.36
우리 행위하는 자들은 이제 시를 거의 읽지 않는다. 관조하는 능력의 상실은 우리가 언어를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정보 및 소통 도취에 빠진 우리는 언어를 관조하기로서의 시 쓰기를 멀리한다. 심지어 우리는 시 쓰기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 p.36
우리는 인간이 창조한 세계 안에서, 사용대상들 사이에서, 집 안에서, 길거리에서, 도시에서 산다. 그리고 거의 모든 시간에 우리는 이 모든 사물을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아서 할 수 있는 인간적 행위의 관점에서만 그 모든 사물을 본다.
세잔의 무위의 풍경은 인간화된 자연과 결별하고 인간화되지 않은 사물들의 질서를 재건한다. 그 질서 안에서 사물들은 사물들 자신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세잔의 사과는 먹어 치우기에 적합하지 않다. 세잔의 단지와 접시는 위하여에, 곧 인간의 목적에 예속되어 있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고유한 존엄성을, 고유한 찬란함을 지녔다. --- p.43
거침없이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인간 행위의 절대화가 임박한 재앙의 원인이라면, 인간 행위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따라서 행위에서 관조적 성분이 차지하는 몫을 높이는 일, 바꿔 말해 행위에 성찰을 덧붙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 p.70
존재는 시간적 차원을 지녔다. 존재는 느림과 오램 안에서 성장한다. 오늘날의 단기성은 존재를 허문다. 당신이 존재 곁에 오래 머무를 때 비로소 존재는 농축된다. 그런데 정보 곁에 오래 머무르기는 불가능하다. 정보는 존재의 절대적 소멸 단계에 해당한다. --- p.85
우리는 존재 결핍을 벌거벗은 삶의 연장을 통해 벌충하려 한다. 그러면서 집약적인(강렬한) 삶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다. 집약적인 삶을 더 많은 생산, 성과, 소비와 혼동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생존꼴들일 따름이다. --- p.88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행위하는 삶의 최종 목적은 관조하는 삶의 행복에 종사하는 것이다. “행위하는 삶은 관조하는 삶을 향한다.” 관조하는 삶은 “인간의 삶 전체의 목표”다 .--- p.91
인간이 세계를 대하는 주된 방식이 바라보기였을 때, 인간은 결핍 없는 신적인 존재와 아직 관련되어 있었다. --- p.95
관조하는 삶이 비로소 신적인 자족을, 완전한 행복을 약속한다. 역사는 행위하기가 완전히 밀려나고 바라보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에, 곧 무위의 안식일에 완성된다. --- p.98
쉼은 창조의 본질적 핵심이다. 안식일이 비로소 창조에 신적인 장엄함을 부여한다. 쉼이 신적이고, 무위가 신적이다. 쉼이 없으면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잃는다.--- p.102면
인식을 향한 길, 진실을 향한 길로서의 관조는 행위하기에 선행한다. 관조하는 삶 없는 행위하는 삶은 눈먼 삶이다. --- p.134
낭만주의는 자연에 신적인 찬란함을 입혀준다. 자연을 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자원으로 간주하는 순간에 벌써 우리는 자연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자연을 도구로 취급하는 우리의 태도는 불가피하게 파국으로 귀결되는데, 낭만주의의 자연 이해는 그 태도를 수정할 잠재력을 지녔다. --- p.142~143
도래하는 평화의 나라에서 인간과 자연은 화해한다. 인간은 살아있는 것들의 공화국에 속한 시민일 따름이다. 식물들, 동물들, 돌들, 구름들, 별들도 그 공화국의 동료 시민이다.--- p.156 --- p.156
출판사 리뷰
도파민 홍수 시대 우리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삶의 형태는 ‘무위’다!
현대 사회에 잊힌 덕목인 ‘관조적 삶’ 재조명 노동과 성과 강제에 맞서는 ‘무위’ 능력 고찰 한나 아렌트의 ‘비타 악티바(행위하는 삶)‘에 대한 독창적 반론
관조하는 삶, 그리고 무위에 대하여
“인간의 모든 노력이, 그리고 온 역사가 향하는 목표가 아무튼 있다면, 그 목표는 오로지 바라보기에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현대 사회에 잊힌 덕목인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을 재조명하며, ‘무위하는 삶’에 찬사를 보낸다. 신간의 제목은 『관조하는 삶』. 도파민 홍수의 시대에 성취 욕망과 인스턴트식 도취에 붙들린 현대인들에게 특별한 삶의 태도를 요청하는 비평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의도와 목적’을 띤 활동을 멈추고(무위無爲), 그 순간 ‘마법’처럼 드러나는 세계의 참모습을 바라볼 것(관조觀照)을 주문한다.
한병철에 따르면, 오늘날 성과사회의 잔인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 ‘절대적인 존재 결핍’을 겪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결핍’을 메우기 위해 더 바쁘게 일하고, 더 열심히 소비하며, 여가마저도 정신없는 놀이와 빽빽한 일정으로 채운다. 그들에게 ‘강렬한 삶’은 더 많은 노동, 성취, 소비, 자극을 의미한다. 하지만 저자는 ‘행위의 쳇바퀴’(행위하는 삶)에 머물러서는 진정한 행복과 안식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오히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위”야말로 “삶의 강렬한 형태”라고 추켜세운다.
이 책에는 〈무위의 풍경들〉, 〈장자에게 붙이는 사족〉, 〈행위에서 존재로〉 등 여섯 편의 에세이가 실렸다. 저자의 전작들(『시간의 향기』와 『피로사회』,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등)에서 선보였던 ‘삶의 가속화’, ‘존재의 결핍’ 등의 우리 시대의 중요한 주제를 보다 깊이 있게 다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부터 초기 낭만주의자, 현대 철학자까지 주요 사상가들(플라톤, 노발리스, 한나 아렌트, 니체, 발터 벤야민 등)의 글과 주요 개념들을 폭넓게 인용, 또는 반박하면서 ‘무위’의 숨겨진 역할과 가치, 창조적 힘에 주목한다. 독자들은 이 책에 실린 섬세한 비평을 통해 한병철 특유의 미학적이고 날카로운 통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무위 예찬
“모든 것이 단기적이고, 호흡이 짧고, 근시안적으로 되어버린 이 서두름의 시대에 무위는 희귀하다. 우리는 기다릴 끈기가 없다. 그 끈기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익어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무위하는 삶’을 살라니, ‘관조적인 쉼’을 가지라니 책의 메시지가 꽤나 달콤하게 들린다. 특히나 매일매일 쫓기는 일상에 지친 사람이라면 새삼 눈길이 갈 테고, 한껏 게으름을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책의 몇 대목에서 죄책감을 덜어줄 든든한 아군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병철의 애독자라면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책은 게으름에 대한 찬사나 관조적 명상을 위한 실천법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성장하고 상업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창조적인 무위’를 호명하고 옹호하는 책이다.
한병철에 따르면, 무위는 한낱 게으름이나 거부, 무기력한 삶의 태도, “활동의 공백”이 아니다. “고유한 논리, 고유한 언어, 고유한 시간성, 고유한 구조, 고유한 찬란함, 고유한 마법”을 지니고 있는 “인간 실존의 찬란한 형태”다. 자본주의는 생존을 절대화하고 효율성과 기능성을 중시하지만, 오히려 “참된 행복은 목적 없고 효용 없는 것 덕분에, 고의로 장황한 것 덕분에, 비생산적인 것, 에둘러 가는 것, 궤도를 벗어나는 것, 남아도는 것, 아무것에도 유용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종사하지 않는 아름다운 형식들과 몸짓들 덕분에 있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무위의 예식성).
한편 ‘무위’는 일종의 창조적인 세계로 넘어가는 “문턱”이다. ‘행위’(행위하는 삶)는 주어진 목적과 목표에 따라 똑같은 것들을 반복, 재생할 뿐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발명하는 인간에게는 “목적 없고 규칙 없는 행위를 하기 위한 (무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그 무위의 시간 속에서 “전혀 다른 무언가, 있었던 적 없는 무언가의 발생이 가능해진다.”(무위의 변증법) 이처럼 ‘무위’는 목적과 효용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 삶을 위한 해독제, 창조력의 원천이 된다.
인간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위’
“활동에서 무위가 차지하는 몫만큼 활동은 진정으로 인간적이다.”
한병철은 ‘무위’가 인간적인 것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쉼이 없으면 새로운 야만이 발생한다. 침묵은 말을 심화한다. 고요가 없으면 음악은 없고 단지 소음과 잡음만 있다. 놀이는 아름다움의 정수다.” 그는 만약 우리에게 “망설임과 멈춤의 순간”이 없으면, 우리의 행위는 맹목적인 능동과 반응으로 변질된다고 경고한다. 자극-반응, 욕구-충족, 목표-행위의 패턴이 지배할 때 우리의 삶은 생존으로, 즉 “벌거벗은 동물적 삶으로 쪼그라든다”. ‘무위’ 능력의 상실은 곧, 우리를 “단순히 기능만 하는 기계”로 만든다. 인간의 실존은 활동에 남김없이 흡수되고, 생산 활동에서 벗어난 여가조차 노동의 피로에서 회복하기 위한 시간(곧 “노동의 파생물”)쯤으로, “따분함이 고개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때려죽이는 시간”으로 격하된다.
한병철은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적은 무위”라고 단언한다. 그는 클라이스트의 단편소설 『인형극에 관하여』에서 인간 춤꾼이 자신의 몸짓을 의식하는 순간에 우아함을 잃는 장면에 주목한다. “명인은 연습을 통해 의지를 떨쳐낸다. 명인의 솜씨란 무위다. 행위는 무위에 이르러 완성된다.” 마찬가지로 ‘역사’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한병철은 “행위하기가 완전히 밀려나고 바라보기(관조)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무위의 안식일”에 비로소 ‘역사’가 완성된다고 본다. “안식일이 비로소 창조에 신적인 장엄함을 부여한다. 쉼이 없으면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잃는다.” 그는 ‘무위’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하면서 이렇게 쓴다. “무위가 없으면 삶은 불가능하다. 무위는 살아 있는 놈이 존속하고 번창하기 위한 조건이다.”
‘비타 악티바’와 인류의 위기
“관조하는 삶 없는 행위하는 삶은 눈먼 삶이다.”
한병철이 20세기를 ‘행위의 시대’로 규정한 한나 아렌트를 비판하는 대목은 자못 흥미롭다. 『행위하는 삶Vita activa』을 쓴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자유의 빛나는 모범으로 이상화하며, 불멸의 명성을 추구하기를 “행위하는 삶의 원천이자 중심점”이라고 말한다(“인간은 정치적인 것의 무대 위에서 불멸에 도달한다”). 반면에 ‘관조하는 삶’은 “세계를 외면하는 도피”쯤으로 해석한다. 한병철이 보기에 아렌트의 주장은 “행위하기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고, 오늘날 지구적 위기를 불러온 ‘근대정신’에 물들어 있다. 오늘의 위기는 “자연을 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자원으로 간주”하며 인간의 행위에 완전히 종속시킨 데서 빚어진 결과다. 근대 이후 자연은 “독자성과 존엄”을 완전히 잃은 채, “인간 역사의 한 성분으로, 부록으로 격하”된다. 한병철은 오늘날 문명 위기의 담론에서 회자되는 ‘인류세’를 “인간의 행위가 자연을 완전히 흡수하고 착취하는 역사적 시기”라고 규정한다.
한병철은 이 국면에서 우리가 ‘무위의 윤리’(땅에 비유하자면, 자연적으로 형성된 땅의 가능성을 존중하고, 인위적인 변화를 가하지 않고 놔두기)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거침없이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인간 행위의 절대화가 임박한 재앙의 원인이라면, 인간 행위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따라서 행위에서 관조적 성분이 차지하는 몫을 높이는 일, 행위에 성찰을 덧붙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는 인류의 미래는 “행위하는 사람들의 권능”이 아니라 “관조하는 능력을 되살리기”에 달려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관조하는 삶을 도외시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영혼의 타락과 온 지구의 소진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피로사회 : 패러다임 전환
(한병철 2010)
책소개
한국에서 독일로 날아간 철학자, 독일 최고 권위지의 격찬을 받으며 현대사회를 비판하다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철학적 진단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가 낳은 성과사회, 현대인들을 모두 노동수용소에 가둬두다!
출간 즉시 철학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가 된 책으로 저자 한병철은 현재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이다. 그는 현지에서 서양 철학의 언어를 구사하며 그 속에 동양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새로운 종류의 문화비판가로 평가 받았으며,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예리하게 포착해 독자들을 열광케 했다.
저자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성 내지 부정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에서 그러한 부정성이 제거된 사회,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20세기 후반 이후 일어났다고 보고, 이 새로운 사회를 성과사회, 그리고 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성과주체라고 명명한다. 과거의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이며,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 그러나 부정성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긍정성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귀결되며 타자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여전히 진정 자유롭지 못한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에 대한 답을 구하라
저자는 성과사회의 과잉활동, 과잉자극에 맞서 사색적 삶, 영감을 주는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피로’의 개념도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란 할 수 있는 능력의 감소이고, 그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무위의 가치에서 출발하는 한병철은 피로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본다. 피로는 과잉활동의 욕망을 억제하며, 긍정적 정신으로 충만한 자아의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한다. 피로한 자아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정보의 지배 :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병철 2023b) 정보의 지배 :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병철 전대호 디지털화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현상과 언어에 대한 세밀한 관찰로 그려낸 정보사회의 초상. 오늘날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를 서술한 이 책에서, 한병철은 그 위기를 공론장의 디지털 구조변동에서 찾는다. 2023
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병철 2021) 한병철 전대호 꾸준하게 오늘의 세계에 대해 예리한 분석과 비타협적인 비판을 선보여온 철학자 한병철의 신작. ‘리추얼’을 열쇳말 삼아, 우리 사회가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진단하고 더 좋은 삶을 위한 모색을 이어간다. 2021
서사의 위기 : 스토리 중독 사회
(한병철 2023a)
- 한병철 최지수
- 『피로사회』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이번에는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슈만 좇느라 정작 자기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스토리 중독 사회를 고발한다.
- @발터벤야민 1892 아우라 깊은심심함
#강연
2023 “정보란 무엇인가 : 정보의 지배”
(한병철 2023c)